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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에세이] 살아있다는 슬픔

우리 모두는 수십억 년의 진화와 생존의 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번식에 실패한 적 없는 조상의 자손들이다. 약육강식의 혹독한 지구쇼에서 기어코 살아남은 유전자를 종합한 서바이벌 DNA 패키지, 그런 면에서 우리는 사뭇 위대한 존재다. 하지만 이런 대단한 업적도 지구 위의 모든 인간이 한 명도 빠짐 없이 공평하게 갖고 있으니, 남보다 잘나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에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. 오히려 저 메세지가 던지는 통찰은 더 뼈아프다.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종이다.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우리 친척 인류는 누가 다 멸종시켰을까?
생존의 많은 문제가 해결된 우리 현대인들은 구태여 사나운 기질을 드러내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의 머리를 깰 일이 많지 않다. 그래서 스스로를 과거의 야만적인 인간들보다 훨씬 도덕적이고 고상하다고 생각한다. 하지만 이렇게 먹고 살기 좋은 시대에도 인간은 늘 서로를 미워하고 시기하고 험담하고 모함하며, 편을 가르고 차별하거나 죽이기까지 한다. 드러내지 않지만 별 것 아닌 일에 감정이 상하기 일쑤이고 온갖 불평 불만으로 한 번 뿐인 삶을 낭비하다가 죽는다. 나는 내 안에 별 시덥잖은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, 살아있는 대가로 쥐어진 이 기질들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. 내가 아무리 많은 성찰을 해도, 못돼먹은 존재임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.
살아남기 위해 길러야 했던, 그래서 지금의 인간이 있을 수 있게 한 거친 심성들이 이제는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진다. 이 불필요해진 기질들이 떨어져 나가기까지 또 몇 백 세대의 진화가 필요할지 모른다.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할 시대에도 서로 핵미사일을 겨누고 있는 한심한 현실은 어쩔 수 없지만, 별 이유 없이 미워하던 주변 사람이 있다면 그 미움을 조금은 거두는 게 좋겠다. 생존의 원죄를 짊어진 이 존재가 슬프지 않도록.
현실은 죄지은 것도 없이 우리가 매일 써야 하는 삶의 조서다
- 비정성시, 김경주